아주 거대하고 장엄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천장,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내리쬐는 신비로운 오색의 빛줄기, 그리고 온 성당의 공기와 바닥을 웅장하게 뒤흔들며 밀려오는 파이프 오르간의 묵직한 진동. 음악사에서 이 압도적이고 영적인 ‘공간의 울림’을 가장 완벽하게 오케스트라 선율로 재현해 낸 작곡가가 있습니다. 바로 오스트리아의 거장,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입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계는 화려한 스타성과 자극적인 표제 음악, 혹은 세련된 사교계의 멜로디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이 화려한 유행에 철저히 비껴서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어수룩하고 촌스러운 시골뜨기 취급을 받았고,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지독한 불안 장애와 자격지심에 시달렸습니다.
세상의 거친 야유와 조롱 속에서도 오직 신을 향한 순수한 신앙과 뚝심 하나로 70~80분이 넘는 거대한 대교향곡들을 묵묵히 써 내려갔던 브루크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가려져 있던 그의 눈물겨운 애환과, 고독한 삶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천상의 유산들을 조명해 봅니다.
1. 시골 교사의 운명과 '공부 강박'에 시달린 늦깎이 거장
1824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안스펠덴(Ansfelden)에서 초등학교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브루크너는 어릴 때부터 오르간 소리와 성당의 미사곡들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성 플로리안(St. Florian) 수도원의 소년 합창단원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난했던 시골 청년 브루크너에게 '음악가'라는 직업은 감히 꿈꾸기 힘든 사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초등학교 조교사 생활을 시작하며 한 달에 몇 푼 되지 않는 푼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밭을 갈았습니다. 그가 성 플로리안 성당의 정식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고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30세를 훌쩍 넘긴 뒤였습니다.
늦게 출발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요. 브루크너에게는 지독한 '학습 강박'이 생겼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음악 이론가였던 사이먼 제히터(Simon Sechter)에게 대위법과 화성학을 사사했는데, 스승이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작곡과 공부를 제발 멈추라"고 뜯어말릴 정도로 밤낮없이 이론 공부와 시험에 매달렸습니다. 심지어 40대에 이르러서도 온갖 기관의 음악 자격증 시험을 보러 다녔고, 심사위원들이 "우리가 그에게 시험을 받아야 할 판"이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공부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2. '바그네리안'의 프레임과 한슬리크의 피비린내 나는 폭격
44세라는 늦은 나이에 마침내 음악의 수도 빈(Vienna)으로 이주해 빈 음악원의 교수가 된 브루크너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아닌 지옥 같은 여론의 전쟁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빈의 음악계는 보수적인 고전주의를 옹호하는 '브람스 파'와 혁신적 극음악을 옹호하는 '바그너 파'로 나뉘어 처절한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천성이 순진하고 정치적 감각이 전혀 없었던 브루크너는 우연히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뒤, 스스로 열렬한 바그너의 숭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교향곡 3번을 바그너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급한 애정 고백은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당대 빈 음악계의 절대 권력이자 브람스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독설가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가 브루크너를 표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한슬리크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연주될 때마다 신문 1면에 온갖 악의적인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교향곡이 아니다. 교향곡의 탈을 쓴 괴물이며, 야만적이고 혼란스러운 바그너의 아류일 뿐이다."
소심하고 마음이 유약했던 브루크너는 한슬리크의 비판 기사를 읽을 때마다 방구석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심지어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만난 자리에서 황제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브루크너는 눈물을 흘리며 "제발 한슬리크가 제 욕을 하는 신문 기사를 좀 못 쓰게 막아주십시오"라고 애원했을 정도였습니다.
3. 지독한 강박증과 끊임없는 개정의 늪, 그리고 아픈 사생활
세상의 차가운 야유는 브루크너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정신 질환과 강박증을 자극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나뭇잎, 벽돌, 교향곡의 마디 수, 심지어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유골함에 적힌 글자 수까지 끊임없이 세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독한 숫자 세기 강박증(Numeromania)에 시달렸습니다.
이 자격지심과 불안은 작곡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신의 곡이 초연될 때 관객들의 반응이 조금만 미지근하거나 주변 음악 동료들이 한마디 조언만 건네도, 브루크너는 "내 곡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인가"라며 소스라치게 놀라 악보를 통째로 뜯어고쳤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교향곡들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수정본, 개정본, 초판본 등 수많은 버전(이른바 '브루크너 에디션의 미로')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는 평생 그가 창작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었던 거대한 감옥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삶 역시 외롭기 그지없었습니다. 평생 홀로 살았던 브루크너는 지독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늘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구혼 대상은 늘 17~18세의 어린 시골 처녀들이었습니다. 50대, 60대의 늙은 노교수가 촌스러운 시골 사투리를 쓰며 뜬금없이 청혼을 해오자, 소녀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평생 거절당한 처녀들의 이름을 수첩에 빽빽하게 적어두고 밤마다 홀로 눈물 흘리며 기도를 올렸던, 지독하게 쓸쓸한 이방인이었습니다.
4.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소리의 성당, 3대 걸작
세상은 그를 시골뜨기라 놀렸고,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을 조롱했지만, 그가 오르간 건반 위에서, 그리고 오케스트라 현악기 위에서 쌓아 올린 소리의 성탑들은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불멸의 걸작이 되었습니다.
① 교향곡 제4번 E플랫 장조 <로맨틱 (Romantic)>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 가장 대중적이고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곡입니다. 깊은 숲속에서 맞이하는 여명, 웅장한 금관악기가 울리는 중세 기사들의 사냥 호른 소리, 대자연의 속삭임을 담아냈습니다. 이 곡의 대성공으로 브루크너는 마침내 한슬리크의 그늘에서 벗어나 빈 청중들의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② 교향곡 제7번 E장조: 서정성과 숭고함의 정점
그에게 세계적인 거장의 명성을 안겨준 최고의 걸작입니다. 1악장 도입부에서 첼로가 길게 뽑아내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테마는 듣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우주의 한복판으로 데려갑니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그가 평생 존경했던 바그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쓴 눈물의 애가로, 숭고한 비장미와 깊은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선물합니다.
③ 교향곡 제9번 D단조: 신에게 바치는 미완성의 고백
브루크너가 평생의 고질병인 심장 질환과 싸우며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마지막 유작입니다. 그는 이 곡을 완성하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악보 첫머리에 "사랑하는 신에게(dem lieben Gott)" 헌정한다고 적었습니다. 마지막 4악장을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3악장 아다지오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침묵 속으로 사그라지며 끝을 맺는 이 곡은, 평생 세상의 조롱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던 늙은 거장이 마침내 신의 품 안으로 귀의하는 장엄한 레퀴엠입니다.
5. 브루크너가 현대인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브루크너의 묵직하고 장엄한 호흡은 매 초 단위로 쪼개진 자극적이고 빠른 현대 사회를 버텨내는 우리에게 독보적인 정신적 구원을 선사합니다.
① 소음의 시대에 선물하는 ‘절대적인 침묵의 공간’
브루크너 음악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곡 중간에 갑자기 찾아오는 엄청난 ‘페르마타(총휴지, Generalpause)’입니다. 웅장하게 몰아치던 모든 악기가 일시에 정지하고 찾아오는 고요한 침묵의 순간. 쉼 없이 소음과 정보에 노출된 현대인들에게 브루크너가 설계해 놓은 이 침묵의 여백은, 흐트러진 내면을 가라앉히고 영혼의 진정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최고의 명상 공간입니다.
② 굳건한 뚝심이 보여주는 '인내와 위로'
그는 촌스러웠고 똑똑하게 처세할 줄 몰랐으며, 늘 남들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웅장한 호흡을 고집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 "남들의 비웃음과 유행에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너만의 성전을 지어 올려라"라는 그의 우직한 삶의 궤적은 뭉클한 위로를 전합니다.
1896년 가을, 평생을 비엔나의 쓸쓸한 아파트에서 홀로 보냈던 안톤 브루크너는 72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그가 청춘을 바쳐 음악을 연주했던 오스트리아 성 플로리안 성당의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바로 밑바닥 지하 석주에 영면해 있습니다.
끝없는 인간관계의 피로함 속에서 마음에 중심을 잃어버렸거나, 유독 내 삶의 속도가 세상에 처지는 것 같아 깊은 불안감이 밀려오는 시린 밤이 찾아온다면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2악장 아다지오》나 《교향곡 4번 '로맨틱' 1악장》을 조용히 들어보세요.
성당 가득 울려 퍼지는 오르간의 잔향처럼 당신의 가슴을 포근하게 가득 채우는 거장의 장엄한 사운드가, 당신의 흐트러진 상처를 가장 숭고하고 단단하게 어루만져 줄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